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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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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끝자락 



일년 전, 빨간 벽돌의 오래된 빌라로 이사오는 날, 전에 살던 사람들의 짐이 다 빠진 텅 빈 집을 보고 불안해졌다. 짐이 빠지니 보이는 벽 위의 세월의 흔적들, 생각보다 어두운 구조, 나의 첫 자취, 나 잘한 걸까? 텅텅 빈 방에 퉁퉁 울리는 발걸음으로 집안을 서성거렸다. 침실이 될 방에 들어가 둘러보는데 창문 유리는 답답하게 시트로 막혀져 있어 빛도 들지 않았다. 허탈한 마음으로 밖도 안 보이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내 눈 앞에 펼쳐진 상황에 마치 아무도 모르는 보물을 찾아낸 사람처럼 와! 하고 탄성을 질렀다. 높이 위로 솟는 나무가 창문 바로 앞에서 푸릇푸릇한 여름 잎을 흔들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매미소리가 왕-왕-하며 순식간에 집안을 가득 채웠다. 창문을 열어보니 이 집은 여름 그 자체였다.

 

이걸 모르고 이 집에서 살다니, 바보들! 이 창문을 이런 시트로 덮고 책장으로 가리다니! 그걸 모르고 이 집을 계약한 나는 엄청난 행운아였다. 이제보니 창문도 일반 창문이 아니라 곡선형태로 꺽인 파노라마 모양이었다. 신나는 마음으로 집을 꾸밀 생각을 하며, 내 리스트 가장 위에 '창문 유리 투명으로 교체'라고 적어두었다.

 

일년전에 발견한 이 비밀의 창문 덕에 여름 내내 아침마다 숲 속에서 깨는 듯한 상쾌함을 즐겼다. 열어둔 창문으로 무겁지만 향기로운 여름 바람이 이마로 내려온 머리카락을 솔솔 불고, 일년 사이에 함께 하게 된 귀여운 강아지 룸메이트 수리가 탁탁탁탁 소리를 내며 깨우러 오면 함께 아침부터 해가 쨍쨍한 골목 골목을 돌아다니곤 했다. 추위에서 벗어나 마음 편히 산책을 하나 싶었는데, 이제 1살이 된 수리의 첫 여름은 조금 힘들었는지, 하루가 길어질수록 몇 보 걷고 털썩 길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럴만도 하지, 밍크 코트를 두르고 한 여름을 걷는다고 생각해봐."라고 엄마가 웃으며 말하곤 했다.

 

우리는 여름 동안 그늘을 찾아다니며 쏘다녔고, 여름이 하루이틀 만에 끝나지 않는 다는 것을 받아들인 수리는 최후의 수단으로 "입수"를 하기 시작했다. 길을 나서면 정신없이 나를 끌고 가 어디가 되었든 물이 고인 곳을 찾아 (주로 아파트 단지 내 분수, 큰 공원의 호수, 여행간 곳의 계곡 등) 털썩하고 물 속에 앉아버렸다.

 

시간이 지나 며칠 전부터는 에어컨을 켜지 않아도 시원하게 잘 수 있게 되었다. 파노라마 창문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쌀쌀해 잠결에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올렸다. 시원해지니 얼른 밖으로 나갈 용기가 생겼는지 수리가 나를 찾아오는 시간도 조금씩 빨라지고 있다. 우리는 이제 조금은 푸르스름한 길거리를 나서 해가 뜨기 시작할 때 쯤 집에 들어온다. 여름이 지나는게 아쉬운지 뒤늦게 찾아온 장마도 이제는 제법 차가운 비로 우리를 서늘하게 한다. 쨍한 날은 가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혼자였다면 여름이 끝나고 추운 겨울을 향해 매일을 스쳐보내는 것이 벌써부터 마음이 아릴텐데, 날이 풀려 더 오래 더 멀리 함께 걸을 수 있는 여름의 동반자와 함께 하니 오히려 시원한 여름의 끝자락이 반가웠다.

 

그렇게 나는 여름의 떠나가는 뒷모습마저도 사랑하게 되었다!















파노라마 창틀에서 아침 햇살을 맞는 수리.

















너무 더워서 누워서 물을 마시는 수리.

















더워서 걷지 못하는 수리-

여름에 약한 강아지,

여름을 사랑하는 언니가 함께 하는 법.
















강아지는 더우면 혀를 내밀어 온도를 낮춘다.

최대한 혀를 내민 수리.

















잠시 수리를 집에 두고

한여름날의 재즈 공연을 보러왔다.

















임수민 ㅣ 스트리트 포토그래퍼

@sooeatsyourstreetforbreakfast

 

길거리에서 잊혀져가는 순간과 사람들을

담다가 어느날 불현듯 태평양 항해를 하러 떠났다.

현재는 글로벌 브랜딩 일을 하며

반려견 수리와 함께 일상 속의 모험을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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